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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인생(6) - 보호자 / 유 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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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영 2006. 11. 1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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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인생(6) - 보호자 / 유 미 자 친정아버지께서 위암선고를 받고 수술을 기다리고 계신다. 가을의 초입에서 헤이즐넛향에 심취해 있던 난 느닷없는 언니의 전화목소리에 그만 할말을 잊고 말았다. 전화선 저쪽의 언니는 근육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느리게 말을 이어간다. '나,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 너도 내려 와야지?......' 대답을 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 허리엔 어느새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감탄사가 입 안에서만 맴을 돈다.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오는 것을 모르고 다람쥐처럼 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 속에 갇혀 나 자신을 위무하며 나밖에 할 수 없다는 독선주의에 빠져 팍팍하게 살았다. 자동차로 2시간이 소요되는 멀지 않은곳의 부모님 뵙기보다 가족나들이며 취미활동은 바쁜틈을 내어 다녀오곤 하였다. 그뿐인가 지난 여름 집중호우로 친정마을이 고립되고 논과 밭이 진흙탕이 되었어도 한걸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전화 한 통화로 안부를 대신하지 않았던가. 수화기를 든 손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난다. ' 퇴근하는대로 내려갈게.' 언니와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서있었다. 오후업무를 정신없이 마무리하고 밤 열시가 되어서야 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으로 향했다. 사위는 이미 한밤중이고 밤하늘엔 조각난 달님이 구름에 가려 모습이 얼비친다. 가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키작은 들풀도 기지개를 켜듯 작게 흔들린다. 남편과 두 아이를 태운 자동차가 용인을 벗어나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외할아버지의 위급상황을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때 아들 아이는 많이 놀라는 듯 했다. '엄마, 외할아버지 건강하셨잖아!' 아이의 목소리가 달리는 차안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그래 건강하셨지.' 혼잣말로 웅얼거리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올봄 대학에 진학한 아들은 외할아버지로부터 축하편지를 받고 어린애처럼 좋아했었지. 설날 때마다 붓글씨로 '공부 열심히 하거라' 고 쓰여진 봉투를 건네주시던 할아버지께서 위암이라니 그것도 말기...내 아이도 아버지의 막내딸인 나도 "위암 말기" 라는 용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얼마쯤 달렸을까, 우리 네식구를 태운 자동차가 터널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나트륨전등이 평행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터널안은 대낮보다 오히려 환하다. 눈을 뜨고 있으니 불빛이 아롱거려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내가 초등학교 2, 3학년인가 홍역에 걸려 며칠을 누워지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어린 내 눈에도 강하고, 무섭고, 힘센 군인이셨다. 평소 다정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예의없는 행동을 하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회초리로 넙적다리를 맞았다. 음식을 먹을 때 쩝쩝소리를 내면 안된다,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들면 안된다, 손님이 가실 땐 대문까지 배웅을 해야한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가르치고 또 가르치셨다. 그렇게 엄하기만 하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홍역에 걸리자 나즈막한 목소리로 '얼마나 답답할까, 얼굴에 빨간꽃이 피어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잠든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날 이후로 홍역이 완쾌될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쵸컬릿을 저녁마다 퇴근길에 사오셨다. 내가 먹을만큼만 머리맡에 놓아주시고 나머지는 얼른 벽장속에 숨기셨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 내리는것이 그 당시엔 누구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쵸컬릿이었다. 무섭게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은 내가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셨다. 아버지께 말만하면 무슨일이든 안되는 일 없이 다 되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내편이 되어 주셨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반석처럼 강하고 강물처럼 변함없는 보호자였다. 차창으로 강릉이라고 쓰여진 이정표가 바람처럼 휙 지나간다. 눈을 부비며 고개를 돌려보지만 이정표는 이미 달리기 선수처럼 자꾸만 멀어져간다. 두 시간을 쉬지않고 달려왔다. 야간운전하랴 피곤할텐데 남편은 오히려 내걱정을 한다.강릉외곽도로를 따라 경포방향으로 다시 내달린다. 삼십 여 분을 달렸을까 우측으로 아버지가 계신 병원이 시야로 들어온다.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한다. 병원입구에 도착하자 언니가 수신호로 손짓을 한다. 자정이 넘어서야 아버지께서 입원하신 5층 병동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의 우리 네식구는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말이없다. 무거운 침묵이 서로를 대변하듯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늦은시간에도 불구하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지나간다. 순간 종이처럼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이 형광불빛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슬픈영화를 본 것처럼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앞서 가던 언니가 543호 문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달리는 차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였던가. 말기암 환자들의 투병생활 특히 항암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군인정신으로 노년의 삶을 이어 오신 아버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남편과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침착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만나리라 다짐하며 문을 열었다. 벽을 보고 누워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흐릿한 불빛아래로 드러난다. 침대가까이 다가서는데 오빠와 남동생이 내 손목을 잡는다. 수술을 위해 아버지께서는 위를 다 비우시고 이제 겨우 잠드셨다고 했다. 언니와 함께 병실을 빠져나와 1층 로비로 향했다. 로비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구석진 자리에 언니와 함께 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몰려온다. 박꽃처럼 창백한 언니는 입가에 미소를 보이는 듯 싶더니 스르르 눈을 감는다. '다 잘될거야.' 내 자신에게 주문을 외듯 입속말로 몇번을 반복하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중학교에 갓 들어와서 운동을 하겠다고 아버지의 반 대에도 불구하고 배구부에 입단을 했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땅거미가 질때까지 운동은 계속되었다. 도체전을 앞두고 합숙을 할 때였다. 단체기압을 받으며 손목을 다쳤다. 이 일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는 한걸음에 달려와 코치며 체육선생님께 항의하듯 따지셨다. 평소에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내 곁엔 항상 든든한 아버지께서 울타리처럼 나를 보호하고 계셨다. 어릴적 아버지의 매서운 회초리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만의 사랑방식이었다. 아침 여덟시 삼십 분, 아버지의 수술이 시작된다. 새벽기도를 마친 어머니께서는 목사님내외분을 모시고 병원으로 오셨다. 백발을 곱게 빗질하신 아버지는 야윈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시며 밝은표정으로 찬송을 부르신다.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모든병을 고쳐주마 주 약속하셨네/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주소서/ 찬송을 마치고 절규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와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암덩어리를 고통없이 제거 해주소서. 다른기관으로 전이되지 않게 해주소서. 아버지를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홀홀단신으로 월남하여 우리들을 낳아 키우시며 금은보화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앞에 4남매가 다가가 손을 잡아드렸다. 바위처럼 단단하시던 손이 어느새 종잇장처럼 얇아지셨나 말없이 눈으로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신다. 수술실로 향하는 이동식침상을 따라가며 자꾸만 목이 차오른다. 목까지 시트를 덮으신 아버지는 흔들리는 침상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편안한 모습의 아버지를 배웅하자 열렸던 문이 굳게 닫혔다. 정신을 가다듬고 가슴으로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이제부터 아버지 보호자는 제가 할게요.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그곳에 항상 있어만 주시면 되요.' 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