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아차산 문학상 수상자 발표
제4회 아차산 문학상 2024년 9월 1일 전국공모 마감 10월 31일 24:00 마감
인터넷 접수 209명 우편접수 3명 총212명 636편
외부 심사
발 표: 1차 발표 2024년 11월 10일 개별통지
주최: 현대시선 문학사
본심 심사 시상식 발표
금상 : 권수진_아차산 해맞이 광장 외2편 (상금100만원 상패)
은상 : 전문구_아차산 외2편 (상금 50만원 상패)
동상 : 성백광_아차산의 서사 외2편 (상금 10만원 상패)
동상 : 김회권_징글맞을 배암을 목도리마냥 두르고 (상금 10만원 상패)
동상 : 이생문_아차산 한 소절_ 외2편 (상금 10만원 상패)
2024년 오후 14시 (중랑구 구민회관 4층 소강당) 발표
시상식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강정화_현대시선 대표 윤기영)
제4회 아차상 문학상 심사평
시를 창작함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그러나 해가 거듭 할수록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은 금할 수가 없다. 시의 구조와 전개가 모두 잘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의 아차상 문학상은, 아쉽게도 대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응모작 중에 권수진은 표현의 형상화 면에서 의미호응 관계가 매끄럽고, 리듬감 있는 언어로 은유적 아우라를 만들어 눈에 띄었다. 시퀀스의 자연스러운 언술, 그리고 그 문맥이 끌고 가는 힘이 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금상으로 결정하였다.
전문구는 소재와 관념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언어 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여러 시적 언술들이 하나의 유의미한 질문으로 완성되거나 어떤 유기적 의미망으로 입체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소통과 감동 면에서 약간 멀어져 은상으로 결정하였다.
그 외에 성백광, 김회권, 이생문이 동상에 선정되었다. 이들은 치열한 시적 사유가 잘 드러나 있고, 역사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끌어올려 실감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다는 느낌을 받아 동상으로 결정하였다.
수상한 시인들 모두 축하드리며, 오늘 수상에 들지 못한 많은 분들도 꾸준히 노력하여 큰 시인이 되라고 아낌없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외부 심사_평론가 박호영 문학박사 김영미
당선작
금상_권수진
1. 아차산 해맞이 광장 외2편
아차산성길 따라
만삭의 하늘이 산통을 겪는 동안
수많은 인파는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네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불덩이를 향해
저마다 소원을 빌면
녹음이 짙은 나무는 붉게 물들고
정상에서 부는 바람이
새로운 난생 신화를 받아 쓰네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장엄한 광경을 두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가슴 벅찬 감동이 차오르네
무수한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산고를 끝낸 눈 부신 햇살
영롱하게 반짝이는 밝은 미래가
파도처럼 밀려오네
더는 오를 수 없는 산 정상에서
어둡고 힘겨웠던 지난날 바람에 날리며
새로운 꿈에 부푼 사람들이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네
2. 여리고
견고한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 안에서
전지전능한 신의 가호를 받으며 산다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화평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기도가 간절할수록 천국에 가까워
현실에서 염원하는 바가 모두 실현된다
성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사는 게 전쟁 같아서
전신갑주로 무장한 하루를 버티며 산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땡볕 아래 종신토록 땅을 파고
주말마다 꼬박꼬박 헌금을 갖다 바쳐도
면죄부를 구할 방법이 없다
오직 조물주에게 선택받은 족속만이
지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누렸고
나머지는 고통 속에서
혹독한 원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완고하게 건축된 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방인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분노한 신의 저주로 말미암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무수한 사람들이 고초를 겪으며
소중한 목숨을 잃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성은 더욱 견고해져서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럴수록 믿음의 자식들은 더욱 신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횟수가 잦았고
성 밖으로 추방된 바깥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3. 21세기의 사바나
이 도심 속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지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
회색 빌딩 숲속은 울창하고
전철과 자동차는
치타처럼 빠른 속도로 질주하지
거대한 자본의 공룡 앞에 노출된 우리는
풀을 뜯을만한 목초지를 찾아서
날마다 깡충깡충 뛰어야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즐비한 거리
한 무리의 악어 떼가 제 영역 지키려는
패싸움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지
약육강식이 범람하는 고수부지에 앉아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적자생존의 법칙을 스스로 터득하지
멀리서 보면 아주 평온해 보이는
저 푸른 초원 위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고
끔찍한 광경들을 자주 목격하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지
은상_전문구
1. 아차산 외2편
봉우리에 피어난 넓은 소리
굳은 지식과 합하여 들리는
깊은 속을 허무는 역사
주먹과 통곡의 바위에 각인된 사랑은
풀어 감춘 범굴사梵窟寺의 어울림
두 개의 접점이 맞닿아
심상의 비등점을 찾는다
극한 밀리리터의 차이에
갈라지는 흐름은
쌀바위 가슴 막에 꽂혀
성벽이 녹아내린다
백악지장百樂之丈 거문고의 기상을
휘감아 도는 광나루 속의 연주
끊는 애간장으로 녹아든 기상에
옷고름 역어 지켜온 산
남행으로 한없이 끌려들어
꿈을 이어주는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편 펄럭임에
진동은 감긴 산에도 울림이 든다.
2. 보루
해거름과 소롯한 감성은 무음
검은 두루미의 춤 선이 내려앉아
함성을 삼켜버린 공주의 편린
세기를 버틴 소나무는
잎맥을 타고 터져버린 등걸은
틈마다 함성과 비명이
바람 소리에 박혀 숙성된다
상처로 남겨진 보루는
엎드려 산 날의 흔적
씨앗을 품어낸 둥지라
산굼부리에 흘러내리는
피 빗의 하늘은
퇴색되어 가는 줄기
수국에 파란 점을 찍어
미래로 전하라는 실루엣
고독한 섬김의 통속적인 사랑이
공제선으로 숨어들다 새로 태어난
루樓
3. 소문
냉정하게 내리던 쌀쌀함은
가슴에 투명 얼음 넣어놓고 사라져 버렸지
누룩 방울에 동내 얼굴이 흐려지고
주정뱅이의 헛소리는 잔도 없이 날아다니고
꼬리에 꼬리를 달고 기찻길에 늘어져
촌락의 정거장에 틀어진 집들이 늘어났지
숫돌에 누워 벼르고 벼른 것도 아닌데
칼같이 날카로워 뾰족하게 눈치를 보며
집집이 지게문 속을 주워 담은 겨울 새벽의 날은
스치기만 해도 빨간 인주가 배이지
백지 입술은 알 수 없는 낭설을 담아
형태 없는 UFO로 날아다니며
찍힌 줄 알았던 설은 많은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사그라든 줄 알았지만, 잿불 속에 숨은 검댕이
죽은 듯이 피어나 보풀을 일으키고 있지
처서를 지난 모기 주둥이가 꺾인 줄 알았더니
부허지설(浮虛之設)이 귓전을 맴돌아 가려운 주사기를 꽂아
또 하나의 문을 심고 사라졌어
또 어떤 알코올로 소독을 해야 할지
벌겋게 삭은 냄새가 향기를 뿜기 시작하지
하지만 공소권 없음으로도 사라질지
의문
동상_성백광
11 아차산의 서사 외2편
품속 깊은 암릉 위에 아로새겨진
고요한 예인의 필치와 같은 전설이
바람결에 깃든 묵언으로 남아
잊힌 이들의 눈물과 웃음이 사무치고
저녁노을의 비취색 슬픔이 내려앉으면
그대는 거대한 어머니의 품이 되어
성곽의 흔적마저 따스하게 감싸 안고
백제와 고구려의 숨겨진 속삭임을
별처럼 빛나는 밤에 풀어놓는다
흐르는 강물은 굳건한 가슴에 입 맞추고
수천 번의 계절을 불러내어
잎새마다 시간의 파문을 새기며
새벽의 옅은 안개 속에 영원의 향기를 남긴다
아차산, 너의 푸르른 나래 아래
고요한 역사의 깊은 강이 흘러
누런 잎새 흩날릴 때마다
황혼에 물드는 오래된 절벽과 바위는
옛 왕국의 무게를 간직한 채
시간을 꿰뚫어 보는 신비의 눈으로 빛난다
장대한 시간의 발끝이 닿은 길목에
강산을 주름잡던 왕들은
불사의 신화와 꿈을 지녔으리라
돌 틈에 스며든 숨결, 묵직한 바람의 곡선 속에
잊힌 용맹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면
붉은 태양 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는
낡은 시간의 피로를 빚어내듯 무겁지만
그토록 오랜 시절 별빛이 스며든
밤하늘은 무수한 이야기를 품었으리라
고요한 강물이 적신 돌길
바위의 주름살에 수천 년의 속삭임을 담아
오늘도 다가온다, 저물지 않는 찬란한 아침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로 계속될 이야기가
2. 아차산의 기억
한양이 처음 심장을 두드릴 때
하늘의 이랑에 앉아
왕릉과 성곽의 목소리를 품고
수려한 영혼을 비추는 물거울이 되어서
문명의 그림자와 전설의 한숨이
마치 녹슨 서사시처럼 깊게 새겨져 있어
아차산이 품은 시공의 편린들이
우리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바람의 숨결 속에 산화할 때
저마다 다른 시간을 새긴 암반들 위로
서늘한 안개를 뿌리며 천년을 이어온
시간의 아리아를 부른다
옛 전쟁의 나팔 소리는 산등성이에 묻히고
잎새가 속삭이는 비밀은 나직한 바람을 타고 흘러
묵은 세월의 외침이 차디찬 이끼 속에 간직되어
여전히 침묵 속에 자리한 채
하늘의 설화와 땅의 서사를 끌어안고
돌비를 수놓는 바람의 손끝을 느끼며
억겁을 품은 고요한 이마에 새겨진
무성한 나무들의 숨결은 아득히 흘러
수천 계절의 무늬로 새겨진 골짜기마다
오랜 세월의 이끼가 무심히 돋아난다
사라진 전설과 남겨진 발자국들
그 틈새로 여백의 미학이 흘러
새벽을 깨우는 묵직한 어둠을 뚫고
다시 오르는 빛의 칼날 그 여린 찬란함을 두르며
우리에게서 잊혀 간 경외심을 새길 때
낮게 깔린 아득한 풍경 속에
시간을 품고 영원을 담아 오늘도
무심히 오고 가는 이들을 보듬으며
고요한 선율로 우리의 기억을 일깨운다
3. 고요히 잠든 아차산
옛 왕조의 지친 그림자가 걸어간 곳
녹슨 성곽의 자락에 흔적을 두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결을 따라
바람의 노래가 굽이치는 곳에서
구름이 여과하는 낮은 태양은
비탈을 고요히 쓰다듬고
발길 아래 숨 쉬는 잔상으로 피어나
인간과 역사의 간극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한나절의 짧은 경외가 가슴을 채우고
다시 초록으로 생동하는 순간을 펼칠 때
우리의 시간과 기억을 마치 가는 실로 엮듯
영원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아차산, 그대는 무언의 대화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다독이는 고요한 성역이며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영원의 현존이다
신비로운 능선은 구름의 잔상을 품고
천년의 침묵 속에서 신령의 숨결을 머금어
그 옛적의 강줄기가 한강을 따라 흐르면
아득히 빛나는 역사의 잔향이 돌과 나무에 스며들어
한양의 숨결을 품은 맑은 바람이 이마에 닿는다
은빛으로 빛나는 초승달은 곡선을 가로지르며
하늘과 땅의 연금술 속에 수천의 나무들이 흔들린다
깊은 구릉 속에 잠든 고고한 풍경이여
한때 전란과 격동 속에 몸을 던져
태고의 야성을 품고 서릿발을 틔웠지만
지금은 그 격정을 수렴하여
만조의 물결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도다
묵묵히 한반도의 혈맥을 이어가며
우리의 길을 이끄는 영원의 표식이라
세월의 풍화에 흔들리지 않으리니
그대의 우람한 품에 모든 비밀이 남아
고운 바람이 머물다 가는 녹슨 고갯길 위로
천 년의 흔적이 잔물결처럼 퍼져 흐른다
가을비가 지나고 떠오른 은은한 달빛 아래
무언의 잔향을 남기며
무수한 발자취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곳에서
모두가 잃어버린 별의 기억을 담아
저 너머 하늘로 흩어지게 하리라
동상_김회권
1. 징글맞을 배암을 목도리마냥 두르고 외2편
징글맞을 배암을 목도리마냥 두르고 연습했다는
이 나라 명궁(名弓)들의 소문이 세상 파다하게 떠돈 날
인력소를 공친 나는
검푸른 빛 감도는 아차산성에 올라
나뭇잎처럼 앉은 두루미를 본다
멀리 가까이 처연히 우뚝 서서
내 한 번도 겨냥 못한
과녁, 그 허연 낮달을 향해
긴 목 젖혀 날갯죽지에서 검은 화살
휘익 뽑아 든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장렬히 싸웠다는 아차산
높은 성벽 위 진을 치고
적진을 향해 무수히 화살 쏘아댈 때
골짝 파고드는 함성과 거친 신음
꿈틀대던 아리수 용솟음치며 콸콸 흘렀으리라
숨어 피던 진달래 화들짝 놀랬으리라
내 예전 뒤틀리고 성난 마음에 시위하며
무방 쏘아댔던 빗나간 화살
목젖 벌릴 때마다 뜻도 의향도 없이 날아가
뉘 시린 가슴에 상처 되고 눈물이 되고
더러 내 심장에도 꽂혀
아파 아파라 했던
세 치도 아니 될 붉은 혀
그 혀 무장 섬뜩하니 오금 저리나
밤낮 무고와 교란을 꿈꾸며
쓰으윽, 쓰으윽
입술 닳도록 허옇게 혀를 간다
차라리 아차산 숲속에 날아든 새들마냥
진종일 입 벌려 노래할 수 있다면
아니, 아예 말은 못 해도
인정의 빛깔로 피고 지는
무명의 들꽃이었으면
오늘도 예사로 무시로 솟구치는
입속의 붉은 혀
그 혀 무서워 차마 입 여닫을 수 없다
당장 차돌 하나 집어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최후의 일격 가해야겠다
2. 꿈결 속으로
우연찮게 광나루 건너 아차산에서 그를 만났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내다
옛적 그대로
성장기 때 멈춘 듯 작달막한 키
숯검정을 발라놓은 듯
까무잡잡한 얼굴과 커다란 주먹코
누가 흉 되게 놀려도 얼굴 찌푸리거나
계산속으로 속여도 화낼 줄 모르는
그저 선한 눈빛인 사내
농사지을 밭뙈기 땅뙈기 하나 없어
찌든 가난 등짐처럼 지고
눈먼 노모 지극정성 봉양했던 그를
사람들은 바보 온달이라 했던가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았던 온달
중심축만 잡으면 삶의 원을 그릴 수 있다는
그 심오한 이치를 어찌 깨달았을까
안 그러고서야 어떻게
어여쁜 평강공주와 백년가약 했을 거고
고구려 일등 무사로 널리 위엄 떨쳤겠는가
꿈결 속 눈을 뜨고 다시 봐도
온달, 그가 영락없다
나는 그만 반가움에 맞잡은 손 높이 쳐들며
아차산 그 푸른 허리
더덩실 춤추듯 한참이나 휘돌았네
3. 비약한 꼼수
독경 소리 방금 스쳐 지나간
영화사(永華寺) 뜨락 느티나무 아래
개밥그릇이 달싹 엎어졌다
근 삼년 차 되는 백구의 밥그릇이다
벌써 반나절 넘게
제 빈 밥그릇 일으키려 안달이다
콧등으로 밀고 앞발로 당겨도 끄떡없다
이빨로 물고 제쳐도 소용없다
살아온 이력이 온통 이빨이었던 개
그 이빨 무기 삼아 세상 호령했던지라
뼛속까지 힘 불어넣고
의기양양 물고 뜯고 잡아당기나
웬걸 단박 물리기는커녕
흐물흐물 빠져나가는 반구형(半球形)
당최 물리지 않는 막사발
제 주특기 호미걸이며 배지기도 먹히지 않는다
지독한 사투와 투지에도 점점 무뎌지는 이빨
백구는 잃어버린 체면에 속 꺼멓게 타들어 갔으리라
세상 맘 같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한데 저 밥그릇 일으켜 뭐에 쓸고
백날 뒤적여도 속 파먹을 무엇 없겠고
매양 일으켜봤자 뜨건 공기만 수북할 터
한데 백구의 품새 그게 아니다
엎어진 제 밥그릇 더도 말고
반나절만 툭툭 밀고 당기다 보면
영화사 허기진 낮밥 공양에
진달래꽃 잘근 씹어대는 배곯은 동자승보다
더 거뜬히 건너뛸 수 있다는
꼼수, 그것 아닐까
영락없다, 저 하는 꼬락서니
동상_이생문
1. 아차산 한 소절 외2편
길목마다 부려놓은 가파른 숨소리에
할 말 많은 옛날이 길안내를 서두른다
전설은 속삭이며 거친 숨을 달래고
여러 색깔의 웃음소리 숲을 곱게 물들인다
아직 온전히 놓을 수 없는
산성 곳곳 허물어진 백제의 꿈
적의 발자국소리를 까치발로 듣고 있는데
보루를 지키는 고구려의 기상은 깃발보다 펄럭이고
쌓아올린 성벽마다 피와 땀에 바랜 흔적 누렇다
아슬아슬한 암벽에서 가부좌 틀고 정진하는 범굴사
풍경이 읊는 법문 소리에 산새들의 마음 경건하고
미소로 답하는 부처
오른손으로 바람을 젖히며 왼손에 든 자비를 내민다
뼈와 살을 깎아내는 석탑의 묵언 수행
수천 년 미래로 나아가는 불성을 키운다
온달의 맹세 품에 안은
평강의 가슴 아직 고구려정에 뜨거운데
신라를 넘지 못한 화살의 가쁜 숨소리 애통하다
한강이 띄운 여명 바라보며
손가락 발가락 장단으로 어깨춤 그윽한 소나무
왕숙천 중량천이 마주보며
함께하자 손짓한다
정상에 올라 구름을 젖히면
하늘에 비친 내 마음도 푸르고
소음에 지친 고요가 촉촉이 스미는 곳
세상 번뇌 서둘러 숲속에 털어내는 사람들
2. 보루군의 숨소리
아리수 건너오는 불손한 발소리 감시하는 척후병
간밤에 자란 긴장이 오싹한 식은땀을 흘리고
가슴에 감춘 길 귓속말로 열던
숨소리가 켜켜이 성벽에 묻어 있다
천지를 호령하는 북소리에 맞춰
지키려는 자와 넘보는 자 서로 보폭을 넓히려던 그날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보루
일제히 창끝처럼 일어선다
한 걸음 한 걸음 남하한 발자국에 핏물 고이고
함성도 북소리도 전장을 휩쓸던 바람소리도
기억을 더듬어 회상이 깊다
백제의 꿈 이루지 못한 돌들의 시무룩한 어깨를 다독이며
승리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보루
죽음을 넘어 풀잎으로 돋아난 혼들이
창을 든 뾰쪽한 돌로 박혀
아직 길목을 지키고
역사도 승리하는 자의 몫이었다고
아차산 푸른 몸을 뒤척일 때
사내의 동맥 같은 물줄기 품에 안은 아리수
천년을 흘러도 남아 있는 먼 길을 유유히 흘러간다
미뤄둔 할 말 토기에 담아둔
죽음을 넘어선 생들이 엉금엉금 걸어 나와
가을빛으로 익어가는 수만의 이야기를 풀며
미래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3. 용마봉에 앉아
그 먼 옛날을 생각한다
백제의 소년이었다가
신라의 사내로 살며
고구려의 어른이 된 백성이 진지 속 온돌에서 나와
천년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옛날과 오늘이 함께 어울려
오래된 이야기가 파릇파릇 돋아난 성벽
먹구름 틈을 비집고 내려온 햇살에
젖은 마음 말리는
돌들의 숨소리 평화롭다
온달장군 고운 마음 달빛에 얹어 놓고
평강공주 그리움을 별빛으로 품는 밤
안개의 포근한 옷차림이 하얀 고름을 푼다
고구려 기상이 휘날리는
맹호의 눈을 닮은 아차산 용마봉
창칼의 크기는 같아도 뺏기는 자와 뺏는자 함성의 크기는 달랐다
전쟁은 이겼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한
보루의 이끼 낀 눈물을 바람이 닦고 지나갈 때
졸고 있는 봄을 깨우는 사월의 함성소리
아리수 타고 흐르는 여명의 빛으로
흙에 쓴 백골의 파란 문장을 읽는다
아차, 순간의 깨달음으로 천년을 일으켜 세웠으나
미처 씻지 못한 반도의 비운을 글썽이는 장수왕
역사의 눈물 자국 찌든 토기 하나
북녘땅 바라보는 설움을 받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