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 안씨(安氏) 인물(人物)_순암 안정복 연구회 회장 안용환
광주(廣州) 안씨(安氏) 인물(人物)
1) 천곡(泉谷) 성(省)
(충정왕(忠定王) 신묘(辛卯)1351~세종3년 1421[71세])
사간공(思簡公)의 자(字)는 습지(習之)요 호(號)는 천곡(泉谷)이시 다.출생시 한눈이 적으시여 초명(初名)을 소목(少目)이라 하였다.
사간공(思簡公)께서는 초명(初名)으로 고려 우왕6년 1380년 경신(庚申)에 성균진사(成均進士)17인중 한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시니, 왕명으로 초명 소목(少目) 두자를 합하여 성(省)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셨고, 외직(外職)으로 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시니 왜적(倭賊)이 침입하여 성(城)을 파괴 하였는지라 공께서 성심 전력하여 성을 보수 개축하였고, 백성들을 인덕(仁德)으로 다스리니 성시중(成侍中: 문하시중, 성석린))이 그 공로와 노고에 대하여 시(詩)를 지어 칭찬 하였다. 공은 포은 정몽주와 도헌 민개,야은 길재와 더불어 의(義)로 사귀여 절친한 벗이 되어 항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염려하여 상심하던중, 결국 고려가 망함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 포은과 야은 두분과 술을 나누고 시를 지어 애석한 정으로 작별하시였다.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고 공을 불러 송경유후(松京留候)를 임명하니 이에 응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선대조 18대가 고려조에 벼슬하여 시중(侍中)이 7인 이요 학사(學士)가 8인 으로 고려에 충성을 다하였거늘, 그 충절을 버리고 어찌 이씨 조정에 벼슬을 하리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선조의 영혼을 뵈옵고 죄와 벌을 감당 하겠는가 하며 통곡하시고, 머리를 주추에 부딪쳐 자결하려 하니 혁명제신(革命諸臣)들이 대들어 해치려 함에, 태조께서 급히 만류하고 나라에 신하된 자 그 임금을 충성으로 섬김이 정당한 도리라 하고, 고려조의 충신으로 융숭히 대우하였다. 그후 공께서는 고려조의 충신들이 수없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병환중이신, 노부(老父)의 안위를 생각하시여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이씨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받으시니 태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시였고, 태조 계유(癸酉) 1393년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 되시여 그 첫머리에 기록 하였다. 태조 병자(丙子) 1396년 봉상소경(奉常少卿), 태종(太宗) 7년 1407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임명,되었으며, 1408년 부친 병환으로 사임을 청(請)하였고, 태종 10년 황해도관찰사 동11년 6월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12년 1412년 강원관찰사 동13년 1413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동13년 5월 1413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동6월 1413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시고 동14년 1414년 영낙(永樂) 12년 4월 22일 태종대왕의 어필왕지(御筆王旨)를 받으시고 동16년 1416년,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동18년 1418년 특배(特拜)로 평양백(平壤伯) (평양감사)을 제수 받으시고 세종원년(世宗元年) 1419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 재임중 신병으로 사임하시였다.
공은 사임후 경상도 하회(河回) 땅에 후손을 위하여 터를 잡고
사시려 하였으나, 세종 3년 향년 71세로 기세(棄世)하시여 공보다
일찍 별세하신 자부(子婦) 감찰공초배위 하동정씨(河東鄭氏)
선장지(先章地)인 광주부 경안덕곡(廣州府京安德谷) 영장산(靈長山) 중록(中麓) 갑자지원(甲子之原)에 예장하였다.
상(上 : 세종대왕)께서 사간(思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증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을 제수하였다.
우리 문중의 보물로 자랑하는, 태종대왕의 어필왕지(王旨)는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서령공 종택이 있는 성재동에 어필각을 짓고 소장봉안중이며, 전라북도 문화재로 등록 되어있다.
공의 숭고한 유덕을 흠앙(欽仰)하고 추모(追慕)의 뜻으로 사림(士林)들이 남원 호암서원(南原湖巖書院)과 장수 용암서원(長水龍巖書院)에위패를 모시고 매년 향사(享祀)를 드리고 있다.
사간공 제향
사간공종중 총회 (음) 9월 말일 텃골 선영
호 암 서 원 (음) 3월 6일 전북 남원
용 암 서 원 (음) 9월 12일 전북 장수